'폭싹' 미술감독의 15개월... '애순·관식 부산 여관방' 벽지에 담은 디테일 이선필 2025. 4. 19.
[첫 대면인터뷰①] 넷플릭스 <폭싹 속았수다> 류성희, 최지혜 미술감독 ▲ 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의 최지혜, ⓒ 이정민 애니메이션으로 처리된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오프닝 타이틀을 보면 영화팬들에겐 익숙한 이름이 보인다. 박찬욱, 봉준호, 류승완, 최동훈 등 2000년대 한국영화 부흥기를 이끈 중견 감독들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구현해 낸 류성희 미술 감독이다. 그리고 류성희 감독의 아트 디렉터로 일해온 최지혜 미술 감독의 이름도 함께 표기돼 있다. 이 드라마가 최지혜 감독에겐 '미술 감독' 데뷔작이기도 했다.
강렬한 이미지의 장르 영화에 주로 참여했던 두 사람이 광례, 애순, 금명 등 3대에 걸친 여성의 대서사시를, 그리고 약 60년에 걸친 제주와 서울의 변천사를 구현해냈다.
600억 원 대의 예산이 들어간 16부작 드라마에서 두 사람의 미술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었다. 경상북도 안동에 마련된 제주 어촌 마을 세트장, 경기도 연천 부지에 마련된 시장 거리 풍경은 시청자들의 마음을 울리기 위한 기본 조건이었다.
이밖에도 서울 종로, 합천, 광주 등에서 조합해낸 '깐느극장'은 금명(아이유)과 충섭(김선호)의 애틋한 사랑이 피어나기에 충분했고, 각종 소품이나 벽지 하나하나도 두 감독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깃든 결과물이었다.
넷플릭스 측에서 두 사람의 서면 인터뷰를 공개한 직후인 지난 10일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한 최지혜, 류성희 미술감독의 작업실에서 그들을 직접 만날 수 있었다.
작품 공개 직후 여러차례 기자가 요청한 끝에 이뤄진 만남이다. 고심하던 류성희 감독이 최지혜 감독의 데뷔를 꼭 알리고 싶다며 어렵게 수락했음을 미리 밝힌다. ▲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미공개 현장 스틸 ⓒ 넷플릭스 대본에 묘사된 사계절, 그 자체로 펼쳐진 상상의 나래 <피도 눈물도 없이>를 시작으로<올드보이> <살인의 추억> <암살> 최근의 <헤어질 결심>과 <외계인 1,2> 등. 대표적인 한국영화로 입지전적 업력을 쌓아온 류성희 감독은 <폭싹 속았수다>로 주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 "19금 작품이거나 호불호가 강한 작품을 해오다가 이렇게 보편적인 작품에 참여하다 보니 그런 것 같다" 며 류성희 감독이 웃어 보였다.
"많은 분들이 두루 좋아해주신 작품에 참여하니 또다른 충만감이 든다. 제가 극중 금명이랑 동갑이다. 숫자로는 쓰지 말아주시라(웃음). 드라마에 담긴 노태우 6.29 선언, IMF 등이 제 삶에도 너무도 큰 영향을 미쳤다.
개인의 삶이 사회적, 정치적 이슈와 무관하지 않은 시대를 살았는데 물론 드라마를 보신 어떤 분들은 너무 정치적인 면을 희석했다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아마 그 시기를 거쳐온 분들이 이 작품에서 본인의 삶을 떠올렸을 것이다. 저도 대본을 읽으며 주마등처럼 막 스쳐 가더라.
제 경험이 드라마 속 묘사와 같아서라기보단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나눈 서사 구조 덕에 읽었을 때 감정이 더 증폭된 것 같다.
애순이와 관식의 파란만장한 혹은 무모했던 이야기들을 계절에 비유하니 누구라도 편하게 자기 인생을 몰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제가 보통은 시나리오를 읽을 때 개인적 상상을 많이 안 하려 한다. 첫 관객으로 보는 것이라 보편적 감정을 읽어야 디자인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근데 <폭싹>은 많이 상상했고 몰입하게 되더라." (류성희 감독)
"일단 전 너무 감개무량하다. 드라마 자체가 너무 좋았고, 김원석 감독님 연출로 시나리오를 봤을 때보다 더욱 생생해진 게 있어 좋기도 했는데 류성희 감독님 옆에 나란히 제 이름을 올린다는 것 자체가 감격이었다.
제 사수시고, 막내일 때부터 10여 년간 함께 일해온 분이니까. 제가 상업 영화로는 < 미쓰GO >(2012)가 첫 작품이었고, <반창꼬>(2012), <숨바꼭질>(2013)을 한 뒤 <국제시장>(2014)에서 류 감독님을 처음 뵙게 됐다. 그 뒤로 <암살> <아가씨> <외계인> 등을 같이 하게 됐다.
제가 1980년대 중반생이라 IMF를 직접 겪었다고 할 순 없지만 제 부모님이 그 시기를 거쳤고, 저 또한 간접적으로 겪은 것들이 있으니까.
그리고 드라마 자체가 워낙 보편적 감정을 다루고 있어서 와닿았지. (류성희 감독 : 어디서 울었어? ) 저요? 1화에서 애순이 엄마를 향해 쓴 시 나올 때부터 눈물 한번 흘리고 동명이 죽었을 때도 그렇고. 감독님이 세세하게 연출해주셔서 많은 부분에서 울었다." (최지혜 감독)
영화 작업, 앞서 말했듯 장르 특성이 강한 작품에 주로 참여했기에 처음 미술 감독 제안이 왔을 때 두 사람은 놀랐다고 한다.
물론 류성희 감독이 <작은 아씨들>과 <마스크 걸> 등의 드라마 작업을 경험하긴 했지만 두 작품이 각각 12부작, 7부작이었던 반면 <폭싹 속았수다>는 무려 16부작이었기에 부담으로 다가올 법했다.
류 감독은 "영화와 호흡이 다른 게 좀 힘들었다. 마치 끝나지 않는 악몽을 꾸는 느낌이었다"고 표현했다.
"우리가 2022년 9월부터 프리 프로덕션에 참여했나? 처음 제안 왔을 땐 놀랐지. 김원석 감독님도 처음 뵈었고, 임상춘 작가님과도 처음이었다. <미생>이랑 <나의 아저씨>를 저도 재밌게 본 터라 감독님의 작품이 관심은 있었지만 16부작을 과연 해낼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며 만났다.
12부작인 <작은 아씨들>도 엄청 힘들게 했거든. 가서 그 자리에서 시나리오를 읽는데 아까 말한대로 제가 막 상상하면서 이미 머리로 작품을 만들고 있더라. 안 할 수가 없었다(웃음).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면 최지혜 감독이 제가 워낙 아끼는 사람 중 하나라 좋은 작품으로 입봉했으면 하는 생각이 늘 있었다.
기다리고 있던 차에 이 작품을 읽는데 드디어 때가 됐다 싶었다. 첫 작품이라는 게 영원히 남는 거잖나. 규모도 크고, 같이 미술 감독을 했다고 할 수 있기에 충분한 작품이라 생각했다." (류성희 감독) ▲ '폭싹 속았수다' 류성희 미술감독 넷플릭스 시리즈 ⓒ 이정민 일사불란했던 미술 작업, 거기에 정서를 심다
두 사람이 <폭싹 속았수다>와 함께한 시간은 총 15개월. 사전 기획, 즉 프리 프로덕션 기간 5개월 중 자료 조사에만 1개월을 할애했다고 한다.
1950년대 60년대의 제주도 어촌 마을 풍경, 사람들의 복식 등을 시작으로 당시 시장이나 서울 중심가의 거리 표현, 버스나 자개장, 비키니장 등 온갖 소품들을 공수하거나 직접 제작하기 시작했다.
한 외신에선 인물들의 감정에 따라 소품이나 미술의 색감이 바뀌는 걸 짚기도 했다. 평소 자신의 작업을 '고고학적 판타지'로 생각하는 류 감독 철학처럼 철저한 조사와 미술 감독만의 상상력과 감각을 가미해갔다.
작업방식은 큰 틀과 방향성을 류성희 감독이 잡으면 그에 따라 최지혜 감독이 구현해내는 식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알려진 대로 통째로 마을 세트를 지으면서 제주 화강암 하나하나를 일부 지역에서 공수하거나 스티로폼으로 세공하기도 했고, 세월이 지남에 따라 같은 집이라도 벽지나 집안 소품을 미세하게 바꿔가면서 생동감을 담보해 낸 식이었다.
"시대극이다 보니 기본적으로 엄청 튀기보다는 잘 묻어나게끔 하는 방향이었다. 그 틀 안에서 인물의 감정이 클 땐 미술도 좀 크게 가고, 차분한 감정일 때는 거기에 맞춰갔다.
그걸 또 봐주신 기자분이 있더라. 자료 조사를 한 달 한 것도 나름 도박이었다. 프리 프로덕션 기간이 길지 않은 상황에서 쉽진 않은 결정이거든.
제주 무슨 박물관, 무슨 도서관, 인터넷 등 뒤지면서 그리고 서울도 시대별로 장소별로 대략의 틀을 잡고, 사계절에 따라 빛이나 색감이 어떻게 다르게 보이는지를 정한 뒤, 김원석 감독에게 발표하면서 세부적인 걸로 옮겨갔다.
제주 마을도 보면 처음엔 초가집이었다가 중간에 슬레이트 지붕, 그리고 또 보수해가면서 시대성을 표현하려 했지." (류성희 감독)
"류 감독님과 시대극(<국제시장>)을 하긴 했는데 <폭싹>은 지역이 다르니까 새롭게 조사하는 느낌으로 임했다. 다행히 제주 아카이빙 사이트에 시대별로 정리해놓은 게 있더라.
어려웠던 건 촬영 시간은 정해져 있는데 시대는 광범위고, 같은 공간임에도 변해야 하는 거였다. 대본을 보면 같은 공간인데 공간 이름이 다양했다. 이를테면 '광례의 집'이 어느 순간 '병철네 집'이었다가 '1970년대 애순의 집', '1980년대 애순의 집', '2000년대 애순의 집' 등 이런 식이었다. 그에 따라 미묘하게 집안 소품이나 벽지 등을 바꿔 갔다." (최지혜 감독) ▲ '폭싹 속았수다' 최지혜 미술감독 넷플릭스 시리즈 ⓒ 이정민 삼대가 거쳐 가는 광례의 집만 해도 열 차례 이상 바뀌었다는 게 두 사람의 설명이었다. "드라마에선 순식간에 지나가는 장면이라도 안 할 수가 없었다.
요즘은 다 캡쳐해서 비교하는 분들도 많다"라며 "심지어 금명이가 하숙방살이 할 때 있었던 비키니장도 정말 여러 개를 만들었다"고 류 감독이 웃어 보였다.
이 지점에서 류성희 감독은 미술에 담긴 정서의 중요성을 짚었다. 가난했던 그들이었지만 절대 그들이 사는 공간이 누추하게 보여선 안 되는 나름의 사명감이 두 사람에게 있었던 것.
"너무 리얼하게 표현하면 보는 사람들도 우울해지고, 화려하면 현실성이 없어지고. 그 선을 지키는 게 어려웠다.
좀 추상적인 얘긴데 기억과 감정을 배경화하는 거잖나. 실제 그 시대를 살았다면 누추하고 막 그랬을 거지만, 그 삶이 누추하게 기억되지 않았으면 했다.
소박하면서도 예쁘게 보이고 싶었다. 예외였던 게 부산 여관 남포장이었지. 거기 만큼은 좀 화려하게 표현했다.
애순과 관식의 화양연화였고 유일하게 제주에서 가장 멀리 떠났던 곳이니까. 판타지를 담고 싶었다. 그곳은 김환기
별들을 박아 놓은 벽지가 김 작가님 그림에서 따온 것이다. 유일하게 찬란했던 일탈의 시간에 축복을 내려주는 마음이었달까." (류성희 감독)
"제가 살던 시대 때 기억은 1990년대에 더 가깝지만 오히려 애순이 어렸을 때가 더 마음에 다가오더라. 그런 향수가 분명 보편적인 게 있는 것 같다. 어린 시절 자전거 타고 놀 때, 친구들과 놀던 기억들은 누구나 있으니까.
여러 사정이 있었겠지만 특정한 제주의 풍경은 감독님이 일부러 안 담은 것도 있다고 알고 있다. 제주의 익명성을 통해 보편성을 확보하려 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드라마 속 도동리 등도 다 가상의 지명이기도 하고." (최지혜 감독)
두 사람의 말을 종합하면 <폭싹 속았수다>의 미술 작업은 단순히 시대의 재현이나 표현을 넘어선 것이었다. "기억과 감정에 대한 리얼리티, (시대가 아닌) 사람들의 기억과 감정을 배경으로 삼았다고 생각한다" 고 류성희 감독이 말했다.
☞ 인터뷰 2가 이어집니다 ('폭싹 속았수다' 미술감독이 가장 공들인 '의외의' 장면). ▲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미공개 현장 스틸. ⓒ 넷플릭스 Copyright © 오마이뉴스. Daum 뉴스 편집입니다! 2025.4.19.아띠할멈.().
|
카테고리 없음